당진의 버그내 순례길에 다녀왔다.
버그내 순례길은 한국천주교회의 초창기 순교자들이 걸었던 길로, 내륙 깊숙이 포구가 형성되었던 삽교천 중심으로, 내포의 사도라 불리웠던 이존창 루도비코의 탄생지 및 활동지였으며,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집안의 신앙이 꽃피웠던 곳이란다.
버그내 순례길은 김대건 신부가 탄생한 곳인 솔뫼성지를 출발하여, 천주교 전파가 왕성하게 이뤄졌던 버그내 장터(합덕전통시장)를 지나 조선시대 3대 방죽인 합덕제, 130년 역사의 합덕성당, 잔혹하게 죽임을 당한 순교자들이 합장된 무명순교자의 묘, 제5대 조선교구장이었던 다블뤼 주교가 거처하던 신리성지까지 13.3km로 공지되어 있지만, 스탬프북은 보면 다블뤼주교와 세 성인의 체포지 거더리공소, 성 위앵 신부의 자취가 있는 세거리공소, 복자 김사집 프란치스코 기념공소 하흑공소까지로 거리도 17.5km 이다.
버그내 순례길 이정표 ‘ㅂㄱㄴㅅㄹㄱ’
버그내 순례길의 시작점은 솔뫼성지 김대건 신부 캐릭터 앞에 안내 표지판에서 부터이다.
화살표를 따라 걷다 보니 길바닥에 ‘ㅂㄱㄴㅅㄹㄱ’이라는 표시를 발견할 수 있었는데, ‘ㅂㄱㄴㅅㄹㄱ’은 버그내 순례길의 자음을 따서 만든 로고라고 한다. 그러나 순례길 코스를 소개하는 설명판은 글씨가 벗겨져 설명을 제대로 읽을 수 없고, 이정표 또한 갈림길에 방향 표지목만 있고 둘레길에서 흔히 볼수 있는 리본하나 매달리지 않았다. 방향 표지석도 우리 처럼 첫 걸음하는 외지인들은 자칫 길을 잃어버릴수 있다. 우리 역시 풍경에 취해 길을 벗어나 알바를 해야만 했다.
주일이고 일정때문에 합덕성당에서 미사를 드리고 스탬프북을 받으려 했더니 떨어진지 오래란다. 스탬프북도 솔뫼성지 문화해설사의 집, 합덕성당 성물방, 합덕수리민속박물관에서 배부한다고 했는데 말이다. 기념품도 준다고 공지 되었는데 이미 소진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문제점을 개선해달라고 하고 싶었는데 이 길의 관리 주체가 어디인지도 모르겠다.
* 코스: 솔뫼성지 → 합덕버스터미널 →합덕전통시장 → 합덕제 → 합덕성당 → 합덕제 중수비 → 원시장·원시보 우물터 → 무명 순교자의 묘 → 신리성지 → 거더리공소 →서거리공소 → 하흑공소
* 거리: 17.5km / 소요시간: 약 4시간 30분~ 5시간
솔뫼성지
솔뫼성지는 한국 최초의 사제인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탄생한 곳으로, 1784년 한국천주교회가 창설된 직후부터 김대건 신부의 증조 할아버지 김진후 비오, 작은 할아버지 김종한 안드레아, 아버지 성 김제준 이냐시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에 이르기까지 4대에 걸친 순교자가 살았다.




합덕제
합덕제는 합덕 평야에 농업용수를 조달하던 저수지로, 연꽃이 만발해 연지라고도 불리었다고 한다. 제방이 만들어진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통일신라 후기 후백제를 세운 견훤이 축조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고 한다. 김제 벽골제의 제방이 일직선인데 비해, 이곳의 제방은 곡선으로 이뤄어져 있어, 이러한 제방의 특성을 인정받아 2017년 국제관개배수위원회 세계관개시설물 유산으로 등재되었다고 한다.







합덕성당
1929년 건축된 고딕양식의 성당으로, 구 합덕성당의 전신은 1890년(고종 27년) 예산군 고덕면 상궁리에 설립된 양촌 성당으로 1899년 초대 본당주임 퀴를리에 신부가 현 위치에 한옥성당을 지어 이전하고, 합덕성당으로 명칭을 바꾸었으며, 그 뒤 7대 패랭 주임신부가 1929년 현재 건물인 벽돌로 된 고딕양식 성당을 새로 지었다.
합덕제 중수비
합덕읍 성동리로 들어가는 마을 입구에 8기의 합덕제와 관련된 비석이 서 있다. 1800년 이후 합덕제 중수를 기록한 비로, 여러 곳에 흩어져 있던 것을 대합덕리에 모아 놓았다고 한다. 합덕제 축조 시기에 대해 두 가지 설이 있는데 하나는 후백제 견훤이 왕건과의 전투를 위해 군마용으로 우물을 파 놓았다는 설과 삼한 또는 삼국시대에 축조됐을 것이라는 설이 있다고 한다.
원시장·원시보 우물터
성동리 출신인 원시장 베드로는 내포지역의 첫 번째 순교자로 1791년 체포돼 천주신앙을 끝까지 고백하다가 감옥에서 순교했다고 한다. 사촌인 원시보 야고보 역시 1788년에 체포돼 청주에서 순교했는데, 성동리에서 가장 오래된 샘으로 알려진 우물은 이 땅의 선조들과 거룩한 순교자들이 마셔온 생명의 샘이며 영혼의 쉼터로, 이곳을 찾는 순례자들 또한 마음을 정화하고 영혼의 쉼터가 되기를 기원하며 조성하게 되었다고 한다.
무명 순교자의 묘
순교자 교우들의 유해가 안장된 곳으로, 원래 마을 어귀에 산재했던 무덤들은 1972년과 1985년 두 차례에 걸쳐 파묘, 이장됐다고 한다. 목격자의 증언에 의하면 두상이 없는 유골들이 많았고, 썩어 부서진 묵주와 십자가가 무덤마다 출토됐다고 한다.
신리성지는 제5대 조선교구장인 다블뤼 주교가 거처하던 곳으로, 다블뤼 주교는 1845년 10월 김대건 신부와 함께 강경에 첫걸음을 내디딘 후 1866년 갈매못에서 순교하기까지 21년 동안 조선에서 활동했다. 그는 내포지방 천주교 유력자였던 손자선 토마스의 집에 은거하면서 황석두 루카의 도움을 받아 천주교 서적을 저술하거나 한글로 번역했다. 또한 조선 천주교사와 순교자들의 행적을 수집했다. 이 자료들은 훗날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의 기초가 됐고, 103위 성인을 탄생시키는데도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거더리공소
거더리는 신리의 자연마을 가운데 하나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다블뤼 주교는 이 곳에 피신하였으나, 자신을 붙잡으러 온 포교들에게 스스로 체포되어다. 오매트르 신부와 위앵 신부도 이곳으로 와서 자수하였고, 황석두 루카도 따라 나섰다. 이들은 모두 보령 갈매못에서 참수하였다. 주교와 두 신부들이 감금되었던 집은 박해 이후 공소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하흑공소
하흑은 아랫 검은돌을 뜻한다고 한다.
현재의 공소는 1980년 재건축되었으며, 복자 김사집 프란치스코를 기념한다. 복자 김사집은 비방구지 출신으로 신앙을 가진 이후로 교리책을 필사하여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애덕을 널리 실천하였다.
1802년 1월 순교에 앞서 "천주와 성모님께 의지하여 교우답게 살아라"는 유언을 자녀들에게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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