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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서울둘레길 가을 걷기 I 8코스 북한. 도봉산 5구간 I 2023년 8월 4일

경원이네 2023. 8. 4. 08:20

 '2023 서울둘레길 가을 걷기' 연일 용광로 같은 불볕 더위는 계속되고 폭염 경고문자가 하루에 몇번씩 오고 있는데 '가을 걷기' 소식을 들었다. 무더위에 걷기 힘들다고 인천둘레길과 종주길 걷기를 중단하고, 문화유산 방문자 여권 투어에 집중하기로 해 놓고 덜컥 신청을 했다.

 

길이 없어지는 것도 아닌데 여기저기 도보여행길을 벌려 놓는지 모르겠다. 혹시 나도 뱃지에 눈이 어두워 그러는 건 아닌지 돌아봐야 겠다. 7월 21일 '서울둘레길 가을 걷기' 전용 스탬프북 배포일정이 발표되어 3일 서울 창포원을 찾았다. 서울날씨 35º, 가만히 서 있어도 땀이 줄줄 흐른다. 도봉산역 2번 출구로 내려와 횡단보도를 건너면 창포원이다. 창포원입구에는 서울둘레길 안내센터 깃발이 나부끼고, 간간히 둘레길을 걷는 이들이 우체통 스탬프함 앞에서 인증사진을 남기고 있다.  문을 열고 들어가 '가을 걷기' 스탬프북 받으러왔다 했더니 정보를 달라며 종이 한장을 내민다. 잠시 후 건내 받은 2장의 스탬프북, 잃어버리면 재발급이 안되니 잘 간직하라는 당부도 잊지 않는다. 

 

서울둘레길은 서울을 한바퀴 휘감는 총 연장 156km의 도보길로 총 8개 코스  21개 구간으로 이루어졌다. 코스의 시작과 끝이 지하철역과 버스 정류장이 연계되어 접근성이 뛰어나 2014년 개통이후 약 6만 5천여명이 완주를 했다고 한다. 우리 부부역시  2017년 옆지기의 허리근력을 키우기 위해 한 번 걸었던 길이라 낮설지는 않다. 

 

첫 출발은 8코스 도봉산구간을 역방향으로 걸었다. 북한.도봉산 구간은 북한산둘레길과 겹치는 구간으로 울창한 숲과 뛰어난 경관, 생태공원, 그리고 전통사찰, 성곽, 무덤등 문화와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곳곳에 조망장소가 있어 서울시내의 아름다운 모습도 볼 수도 있다. 도봉산역 앞 횡단보도에는 폭염에도 산을 오르려는 사람들이 한 손에는 얼음물을 한손에는 손수건으로 연신 흐르는 땀을 닦으며 서 있는 것을 보니 열정이 대한하다.

 

우리 역시 연신 땀을 닦으며 걸어 어느 듯 도봉산 탐방지원 센터 앞에 도착을 했다. 

 

북한. 도봉산구간은 서울둘레길 이정표가 보이지 않아도 북한산둘레길 이정표만으로 걸을 수 있어 걱정할 필요가 없다.

 

본격적으로 출발한다.

 

능원사 앞 도로에 서 있는 안내판의 내용이다.

산에 절이 많은 이유는 무엇일까?

삼국시대에서 고려시대까지는 절을 도읍지를 중심으로 평지에 많이 지었다. 그러나 신라 말부터 유행한 선종에서는 참선을 강조하여 절을 조용한 산속에 짓는 것이 적합하다고 행각을 했다. 이후에도 크고 작은 전쟁을 겪으면서 평지의 절들은 크게 훼손되었지만 산속의 절은 온전히 보존되었다. 또 조선시대의 숭유 억불 정책에 따라 탄압을 피해 절들을 산속으로 옮기게 되었다고 한다. 문화유산 방문 투어를 하다보니 고개가 끄덕여진다. 

도봉산 능원사
도봉사

 

북한산 옛길구간 아치파고라를 통과한다. 무장애 탐방로를 개설하다며 공사용 자재들을 쌓아두어 위험하기도 하다.

 

벌써 온 몸이 땀으로 흠뻑 적셔있다. 물 또한 3병째다. 북한산 둘레길 방학동길 포토 포인트인 쌍둥이 전망대는 낙하물 발생으로 전면 통제되고 있다. 

 

멧돼지가 민가로 내려가지 않도록 철망이 설치되었다.  이런 철망은 평화누리길에서 자주 봤던터라 익숙하다.

 

어느 듯 왕실묘역길에 도착을 했다. 조금만 더 걸으면 우이령 입구에 도착을 한다. 시간적으로 더 걸을 수 있었지만 더위에 지쳐 무리하지 않고 우이역에서 전철로 귀가하기로 했다. 

 

양 효안공과 정의공주 묘역 

세종의 둘째 딸인 정의공주의 무덤으로, 좌측이 안맹담, 우측이 정의공주 무덤이다. 이들은 1428년에 결혼하여 4남 2녀의 자녀를 두었다. 안맹담은 초서를 잘 써 서예가로 이름이 높았으며 활쏘기와 말타기에도 출중했다. 정의공주는 성품이 총명하고 지혜로우며 책력과 산술을 잘 이해했다. 세종대왕은 특별히 정의공주를 아껴 저자도(옥수동 동쪽 한강에 있었던 섬)와 낙천정(광진구 자양동에 있었던 정자)을 내려주기도 했다. 안맹담이 세상을 떠나자 조정에서는 양효공이라는 시호를 내려 주었다. '양은 온화하고 선량하다는 의미이며, '효는 어질고 은혜롭게 어버이를 섬겼다는 의미이다. 불심이 깊었던 정의공주는 남편의 명복을 빌기 위해 1469년 「지장 보살본원경 (보물 제966호)이라는 불경을 간행하기도 했다.

 

조선 10대 연산군과 거창군부인의 묘역

연산군은 성종과 폐비 윤씨의 아들로 태어나 왕위에 올랐다. 붓글씨를 잘 쓰고 시를 잘 지어 이름을 날리기도 했다. 그러나 두 번의 사화로 조정이 어지러워지자 반정으로 폐위되고 이복동생 중종이 왕위에 올랐다. 이후 연산군으로 강등되고 강화도로 유배되어 31세로 세상을 떠났다. 부인 신씨는 연산군의 묘를 강화도에서 이곳으로 옮겨줄 것을 요청하였고, 중종은 왕자의 예에 따라 묘를 옮기고 양주군의 관원이 제사를 관리하도록 하였다. 연산군묘 아래쪽에는 태종의 후궁 의정궁주 조씨, 연산군의 딸 휘순 공주와 사위 능양위 구문경의 묘가 있다.

 

서울방학동 은행나무

나무 높이는 25m, 둘레는 10.7m이다. 1968년 나무 형태의 아름 다움과 역사적 가치를 인정하여여 서울시 보호수 제1호로 지정하였다. 2013년에는 문화재적 가치 등급을 상향 조정하여 기존의 보호수 지정을 해지하고 서울특별시 기념물로 지정하였다. 당시 조사 결과 나무 나이는 약 550살로 추정되었다. 예로부터 마을 주민들이 신성 하게 여긴 나무로 여러 일화가 전하고 있다. 경복궁 증축 당시 징목 대상이었으나 마을 주민들이 흥선대원군에게 간청하여 제외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대감나무'라고 불리기도 한다.

 

원당샘

파평윤씨 일가가 자연부락인 원당마을에 정착하면서 주민들의 식수로 이용되었으며, 마을 이름을 본떠 '원당샘'이라 불리어지고 있다고 한다. 물을 받으러 오신 어르신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우이역을 향해 무거운 발걸음을 옮긴다.

 

계획대로 우이동에서 걷기를 마치고 시원한 생맥주 한잔을 마시려 했는데 문을 연 곳이 없어 집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