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바우길에 밀려 잠시 중단을 했던 인천둘레길과 인천종주길 도보여행을 마무리하려고 했지만, 더위가 시작되고 장마까지 예보되어 인천둘레길 도보가 또 다시 중단을 했다. 그리고 7.8월은 문화유산 방문 투어로 계획을 변경했다.
문화유산 방문 투어 2번 째 출정지는 백제고도의 길 공주와 부여, 시간이 되면 논산, 익산까지 다녀올 계획으로 아침 6시에
집을 나섰다. 일찍 나섰음에도 서행과 지체를 반복하다 보니 목적지인 마곡사에 9시가 되서야 도착을 했다. 주차를 위해 마곡사로 들어가려 하자 사찰 주차장은 사찰 관계자들만 주차를 할 수 있다며 입구 주차장을 이용하란다. 다시 내려와 입구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1km 정도의 산책로를 걸었다.
마음을 울리는 한국의 미 - ③ 백제 고도의 길
신록의 아름다운 천년고찰 공주 마곡사
태화산에 위치한 마곡사의 창건에 대해서는 두 가지 다른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태화산마곡사 사적입안』(1851년)에는 자장율사가 중국 당나라에서 귀국 후 선덕여왕의 후원을 받아 세운 7대 가람 중 세 번째 사찰로 창건 이후 다섯 번의 중수가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선교양종대본산마곡사 연기략초』 에서는 “보조선사 체징이 마곡사를 창건하고 그 후 범일국사, 도선국사가 확장과 중수를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매년 봄마다 신록축제가 열릴 정도로 빼어난 풍광을 자랑하는 마곡사는 개울을 사이에 두고 두 개의 공간으로 나누어져 있다. 한쪽은 수행 공간인 남원이고 다른 한쪽은 예불 공간인 북원이다. 남원의 대표적인 전각이자 수행 공간의 중심인 공주 마곡사 영산전보물은 마곡사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영산(靈山)’은 석가모니가 설법했던 영축산의 준말로, 이 산을 사찰 내에 옮겨놓은 공간이 바로 영산전이다. 북원의 대표적인 전각인 공주 마곡사 대웅보전보물은 내부가 거의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다. 우리나라의 석탑과는 다른 느낌을 주는 공주 마곡사 오층석탑보물도 지나치지 말아야 한다. 라마탑과 비슷한 이 유적은 고려 후기 원나라와의 교류를 통해 들어온 라마교 문화의 대표적인 예다. 또한 마곡사는 화승(畵僧) 계보로도 유명해 남방화소(南方畵所)라 불릴 정도로 수많은 화승을 대대로 배출하였으며, 오늘날까지 화승들을 추모하는 불모다례재를 행하고 있다.
해탈문과 천왕문을 지나면 5층석탑 뒤로 마곡사의 주불을 모신 대 광보전이 위치하고 있다.
영산전은 석가모니불과 일대기를 담은 팔상도를 모신 법당을 가리키는데 이 건물은 천불(千佛)을 모시고 있어 천불전이라고도 부른다. 조선 시대 각순대사가 절을 다시 일으키면서(1651년) 고쳐 지은 것으로 마곡사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며 해탈문 서쪽에 자리 잡고 있다.
대웅보전은 석가모니불을 모신 법당을 가리키는데 이 법당은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약사여래불·아미타불을 모시고 있다. 이 건물 역시 조선 시대 각순대사가 절을 다시 일으킬 때 고쳐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마곡사 방문을 마치고 20여분 거리에 있는 공산성을 찾았다. 주차장은 500여m 떨어져 있고, 주차장이 협소해 나가는 차를 기다려 겨우 주차를 했다. 스탬프는 홍보물에는 매표소에 있는 것으로 안내되어 있으나 매표소가 아닌 관광안내센터에 있다. 관광안내센터에서 스템프를 찍고 성곽에 오른다. 전체를 돌아보는데는 1시간 정도, 성곽길을 따라 걷다보면 금강을 낀 공주를 한눈에 볼 수가 있어 트래킹을 하기에 최적의 장소라고 한다. 날씨도 덥고 해서 30여분 정도 만 짬을 냈다.
웅진백제시기를 대표하는 왕성 공주 공산성
금강변에 있는 야산과 계곡을 둘러싼 백제 시대의 대표적인 성곽으로 원래는 흙으로 만든 토성이었으나 조선 시대에 돌을 쌓아 석성으로 고쳤다. 만들어진 당시에는 웅진성으로 불렸지만 고려 시대 이후로 공주산성 또는 공산성으로 불렸다. 538년(성왕 16년) 부여로 도읍을 옮길 때까지 백제의 왕성이었던 공주 공산성은 조선시대까지 지방행정의 중심지였다. 실제로 성 안에선 백제의 기와와 토기뿐만 아니라 고려와 조선의 유물들도 많이 출토되었다. 또한 이곳은 역사의 주요 장면들이 펼쳐진 곳이기도 했다. 백제가 멸망한 직후에는 의자왕이 잠시 머물렀고, 백제부흥운동의 거점지가 되기도 했으며, 통일신라 시대엔 김헌창의 난(822년)이 일어났었다. 조선 시대에 이괄의 난(1623년)이 일어나자 인조가 잠시 피난을 온 적도 있었다. 능선을 따라 거침없이 뻗어 있는 공주 공산성에는 백제의 기상이 스며있는 듯하다. 이 당당한 성곽의 정문 역할을 하는 곳은 금서루인데, 이곳으로 들어가 성곽을 한 바퀴 돌면 성 안은 물론 공주 시내 전경도 감상할 수 있다. 특히 서문에서는 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공주 송산리 고분군), 백제의 제사유적인 정지산 유적, 금강변에 있는 고마나루 등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 공산성 야경 포인트 공산성 맞은편, 즉 금강 건너편 금강신관공원에서는 능선을 따라 빛나는 공산성의 야경을 감상할 수 있다. 백제문화제 기간에는 공산성 앞에서 부교를 건너 공원으로 갈 수 있다.
공주 마곡사와 공산성 방문을 마치고 30여분을 이동하여 부여 왕릉원에 도착을 했다. 매표소에서 왕릉원과 나성 스탬프까지 2개를 찍고, 아이스크림으로 더위를 식히고 릉에 올랐다.
백제시대 무덤 부여 왕릉원
능산리 산 중턱에 위치한 7기의 무덤들이다. 풍수지리상으로 명당에 조성되어 있는 이곳은 백제 왕족들의 공동묘지로 알려져 있다. 원형으로 봉긋하게 솟아 있는 고분들 가운데 1~6호 분은 일제강점기 때 조사되어 내부 구조가 확인되었고, 7호 분은 1971년 보수공사 때 발견됐다. 1호 분(동하총) 내부에 그려진 사신도, 연꽃무늬, 구름무늬 벽화는 고구려 고분벽화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고분이 발견되었을 땐 도굴된 상태였기 때문에 약간의 물만 수습되었다. 능산리 고분군 옆에는 백제 왕실의 사찰이 있었던 부여 능산리 사지사적가 있다. 능 근처에 지은 절을 능사라 하는데, 이곳에 있었던 사찰은 안장된 역대 왕들의 명복을 빌었던 곳으로 보인다. 1990년대에 진행된 조사에서 백제 문화의 우수성을 보여주는 백제 금동대향로국보와 사찰의 창건 연대와 발원자를 알 수 있는 부여 능산리사지 석조사리감국보이 출토되었다.
수도 보호를 위한 외곽 방어시설 부여 나성
수도를 웅진에서 사비로 옮긴 538년경에 쌓은 것으로 보인다. 남쪽과 서쪽으로는 금강이 흘러서 자연적인 방어벽 역할을 했기 때문에 부소산성에서부터 도시의 북쪽과 동쪽 외곽을 둘러싸고 있다. 수도의 안과 밖을 구분하는 성곽은 지형에 따라 축성 방식이 조금씩 다르지만 전체적으로 흙을 다져 쌓아 올린 형태로 지어졌다. 가장 높은 봉우리에 봉수 터와 건물 터가 남아 있고, 성안에 왕궁, 관청, 민가 등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충남 부여군 부여읍 염창리 565 Tip 도성, 나성, 산성 도성(都城)은 한 나라의 도읍을 둘러싼 성곽으로 왕성(王城)을 뜻하기도 한다. 나성(羅城)은 안팎의 2중으로 된 성곽의 바깥 성벽을 의미한다. 왕성이 내성(內城)이라면, 왕성 바깥쪽 시가지 전체를 에워싸고 있는 나성은 외성(外城)으로 볼 수 있다. 부여 나성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나성으로 꼽힌다. 산성(山城)은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산에 쌓은 성곽이다. 산이 많은 우리나라는 산성이 압도적으로 많다.
왕릉원으로부터 6분거리에 있는 정림사지와 정림사지 오층석탑을 방문했다. 박물관 주차장에 주차하고 스템프를 찍기 위해 정림사지 주 출입문으로 이동을 했다. 행사관계로 입장료가 없다는 안내문이 붙여져 있다. 매표소에 문이 닫혀 있기에 혹시나 해서 문을 두드리니 여직원이 나온다. 문화유산 방문 투어스탬프를 찍으러 왔다 했더니 내어준다. 밖에 내어 놓으면 방문하는 사람마다 스탬프를 여기저기 찍어대는 바람에 스템프 함 주변도 지저분하고 잉크도 쉽게 마르는데 좋은 방법이다.
백제인의 꿈과 땀이 밴 역사의 현장 정림사지, 정림사지 오층석탑
부여 정림사지(사적, 유네스코 세계유산)는 사비 시대의 중심 사찰이 있던 곳이다. 창건 당시의 이름은 알 수 없으나 고려 시대 때 사찰을 재건할 당시 제작된 기와에 적힌 명문이 발견되어 '정림사'로 불렸음을 알게 되었다. 중문, 탑, 금당, 강당이 남북으로 일직선으로 놓여 있는 구조로, 사비 시대의 전형적인 사찰 건물의 배치 양식을 볼 수 있다. 현재 정림사지에는 백제 시대에 세워진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이 남아 있다. 목조건물에 사용되는 배흘림 기법이 적용된 이 석탑은 목탑의 구조를 석재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목탑의 양식을 그대로 모방한 것이 아니라 치밀한 구성을 바탕으로 세련되고 창의적인 조형미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꼿꼿하게 서 있는 탑에선 장중한 기품이 느껴지지만, 위로 살짝 솟아있는 지붕돌의 처마 귀퉁이로 인해 우아하고 경쾌한 인상도 받을 수 있다.
좌 - 일제 강점기인 1942년 발굴조사에서 '태평8년 무진 정림사 대장당초'라고 씌여진 명문 기와가 출토되어, 고려 현종 19년(1028) 당시 정림사로 불리었음이 밝혀져, 이후로 이 절터는 정림사지로, 탑은 정림사지오층석탑으로 불리우게 되었다.
우 - 정림사지오층석탑은 과거에 '평제탑'이라 불렸다. 백제 사비성을 침공한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탑의 1층 탑신에 승전 기공문인 '대망평백제국비명'을 새겨놓았기 때문이란다.
사비시대의 중심 산성 부소산성
부소산을 둘러싼 사비시대의 도성이다. 『삼국사기』에는 ‘사비성 ’ 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성이 위치한 산의 이름을 따서 부소산성이라 부른다. 이곳은 538년(성왕 16년) 웅진에서 사비로 수도를 옮긴 뒤 백제가 멸망할 때까지 123년 동안 백제의 도읍지였다. 군창 터와 건물 터가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유사시에는 군사적 목적으로 사용했고 평상시에는 왕과 귀족들이 아름다운 경관을 즐기던 장소로 사용된 듯하다. 완만한 언덕길을 오르다 보면 백화정이 나타나는데, 이곳에선 유유히 흐르는 백마강의 시원한 풍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이 정자 바로 아래, 즉 부소산 서쪽 낭떠러지에 있는 바위가 낙화암충청남도 문화재자료이다. 백제 의자왕 때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이 쳐들어오자 궁녀들은 이곳으로 몰려와 치마를 뒤집어쓰고 물로 뛰어내렸다. 『삼국유사』 에는 ‘타사암’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훗날 궁녀들을 꽃에 비유하여 낙화암으로 고쳐 불렀다. 낙화암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는 고란사충청남도 문화재자료가 있다. 사찰 뒤쪽 벼랑에 희귀한 고란초가 자라서 고란사라 불리게 되었는데, 바위 사이로 흐르는 약수가 특히 유명하다. 고란약수로 불리는 이 물은 한번 마실 때마다 3년씩 젊어진다는 전설이 있어 방문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낙화암 - 부소산 북쪽 백마강을 향해 우뚝 서 있는 큰 바위이다. 바위는 50m 정도의 높이의 절벽을 이루고 있으며 강물에 이르러 한 번 꺽인 단이있다. 이 단을 이룬 암벽에 송시열이 낙화암이라고 쓴 글씨가 새겨져 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백제가 멸망할 때 궁인들이 화를 피하지 못할 줄 알고 남의 손에 죽지 않겠다며, 부소산 북쪽 모퉁이 큰 바위에 올라 몸을 던져 순절하여 타사암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훗날 사람들이 궁인을 꽃에 비유하여 이곳을 낙화암으로 불렀다고 한다. 낙화암을 제대로 보려면 유람선을 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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