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일 간의 휴식시간.. 옆지기가 섬에 가고 싶어하기에 오랜만에 고향을 가려고 했다. 그런데 몇일간 비가 계속 내리고 돌풍까지 불어 여객선 출항을 장담할 수 없다고 한다. 섬에 들어가는 것을 포기하고 문화유산 방문투어를 하기로 .....
서울과 수도권에서 만나는 대한민국 역사여행 - ⑨ 왕가의 길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한 서울은 백제의 수도였을 땐 위례성 또는 한성이라 불렸고 조선의 수도였을 땐 한양이라 불렸다. 조선 시대 이후로 현재까지 수도로 존재해 온 이곳은 우리나라의 역사가 압축된 곳으로, 특히 조선 역사의 중심이 라 할 수 있다. 궁궐이 다섯 개나 있다 보니 왕실과 관련된 이야기들이 많이 남아 있는데, 유적과 유물로 남아 있는 풍성한 이야기들은 수원과 화성, 김포와 강화로 확장된다. 서울에서 수도권으로 이어지는 길은 도성 안과 밖을 연결하는 길로, 켜켜이 쌓아온 시간으로 만들어진 길 위에는 왕실의 위엄과 화려한 문화, 번영과 위기의 순간들이 중첩되어 있다.
청동기 시대의 무덤 강화고인돌 유적
고인돌은 몇 개의 받침돌을 고이고 위에 넓적한 돌을 덮은 것을 말한다.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인 무덤 형식으로, 지석묘(支石墓)라고도 부른다. 전 세계에서 발견되기는 하지만 주로 동아시아 지역에 많이 분포되어 있다. 특히 한반도에는 4만 기 이상의 고인돌이 집중되어 있는데, 이는 전 세계 고인돌의 절반 정도를 차지하는 숫자다. 우리나라에 있는 수많은 고인돌 가운데 밀집 분포도가 높고 형식이 다양하며 보존 상태가 좋은 고창·화순·강화 고인돌 유적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여기에 포함된 강화도의 고인돌은 70여 기 정도인데, 그중 하나가 강화 부근리 지석묘사적다. 고인돌은 형태에 따라 크게 탁자식과 바둑판식으로 구분 된다.탁자식은 땅 위에 판석을 세워 돌방을 만든 다음 그 위에 덮개돌을 얹은 것이고, 바둑판식은 땅 아래 판석을 세워 돌방을 만든 다음 땅 위에 조그만 고임돌을 놓고 그 위에 덮개돌을 얹은 것이다. 탁자식 고인돌은 주로 북쪽에서 발견되는 반면, 바둑판식 고인돌은 주로 남쪽에서 발견된다. 그래서 각각의 고인돌을 북방식과 남방식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강화 부근리 지석묘는 전체 높이가 2.6m, 덮개돌의 길이가 6.5m에 이르는데, 이는 우리나라에 있는 탁자식 고인돌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큰 것이다. 2개의 대형 고임돌 위에 얹혀 있는 덮개돌의 무게는 무려 50톤에 달한다. 웅장하면서도 세련된 조형미를 보여주고 있는 부근리 지석묘는 선사 시대의 문화와 기술, 사회구조, 정신세계 등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귀중한 유산으로 평가받고 있다.
1,600년 역사를 간직한 사찰 강화 전등사
강화도에는 단군과 관련된 장소가 있다. 하나는 마니산이고 다른 하나는 강화 삼랑성사적이다. 단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고 전해지는 삼랑성은 ‘정족산성’이라고도 하는데, 고려의 수도 개경과 조선의 수도 한양의 외곽 방어 기능을 담당했다. 삼랑성 안에 위치한 전등사는 강화를 대표하는 사찰로, 381년(소수림왕 11년)에 아도화상이 창건한 것으로 전해진다. 원래 이름은 진종사였으나 고려 때 ‘불법의 등불을 전한다’는 뜻의 전등사로 바뀌었다. 이후 몇 차례의 화재를 겪으며 건물이 소실되는 아픔을 겪기도 했으나 1625년(인조 3년)에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조선은 불교를 억압하는 정책을 폈지만 전등사는 왕실의 비호를 받았다. 정족산성 안에 조선왕조실록국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을 보관하는 사고(史庫)가 있었는데, 전등사가 실록을 보호하는 수호사찰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조선 말기인 1871년(고종 8년)에는 이곳에 무기와 식량을 보관하는 창고를 지었고, 이듬해에는 50명 승군(僧軍)을 두기도 했다. 삼국시대부터 이어져 온 기나긴 역사를 자랑하는 전등사에는 귀중한 문화재가 많다. 유려한 곡선과 화려한 장식이 고풍스러운 강화 전등사 대웅전보물, 중국에서 건너온 전등사 철종보물, 조각 수법이 뛰어난 강화 전등사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보물 등이 대표적이다. 전등사 서쪽에는 실록을 보관하던 강화 정족산사고지인천광역시 기념물가 있다.
전등사에 들어서려면 성문을 지나야 한다. 단군의 세 아들 부여, 부우, 부소가 쌓아서 이름 지어진 삼랑성! 고대 토성으로 시작한 이곳에 민초들이 거칠고 둔탁한 할석을 정성스레 다듬고, 호국의 염원을 담아 쌓아 오늘에 이르고 있단다. 삼랑성은 산의지형을 이용해 능선을 따라 축조한 성으로 길이가 2,300m 정도이며, 동서남북 각 방향에 성문이 있다.
전등사로 향하는 길목에서 마주하게 되는 이 소나무에는 아직도 아물지 않은 큰 상처가 선명하게 남아 있다. 일본은 태평양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자 쇠붙이를 얻기 위해 사찰의 종, 숟가락, 젓가락까지 공출이란 이름으로 빼앗 가면서 소나무의
송진까지 공출 품목에 넣어서 수탈하였다. 지금도 주변의 큰 소나무에서 발견되는 상처들은 태평양 전쟁당시 무기의 대체연료로 송진을 채취하기 위해 만든 침략의 깊은 상혼의 흔적으로 보는 이들에게 침묵의 역사를 전하고 있는 듯하다.
대응보전은 절의 중심 건물로. 석가모니불과 아미타불, 약사여태불을 모신 곳이다. 대응은 법화경에서 위대한 영웅을 뜻하는 말로. 석가모니불을 가리킨다. 보살은 석가모니불과 같지만 중생교화를 중심으로 말한 것이다. 강화 전등사 대웅보전은 화려한 내부 장식과 능숙한 조각솜씨가 돋보이는 조선 중기 사찰 건축물이다. 조선 광해군 13년1621에 다시 지은 것으로지봉 처마 무게를 받치는 구조인 공포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등과 기등 사이에도 짜여 있는 다포양식 건물이다. 건물 네 모서리 추녀 밑에는 벌거벗은 사람의 모습을 조각하였는데, 전설에 따르면 절을 짓던 목수의 재물을 가로챈 주막 여인의 모습이라고 한다. 나쁜 짓을 꾸짓어 하루 세 번 부처님 말씀을 들으며 죄를 씻고, 깨달음을 얻어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라는 의미로 추녀 밑에 새겨 추녀를 받치게 하였다고 한다.
추존왕 원종과 부인 인헌 왕후의 무덤 김포 장릉
조선시대 왕과 왕비의 무덤인 조선왕릉은 당대의 사상과 장묘문화, 자연친화적 구조와 예술성이 압축되어 있는 문화유산이다. 풍수사상을 기초로 한양에서 멀지 않은 곳에 터를 정했는데, 이는 ‘도읍지의 4대문 10리 밖 80리 안’에 위치해야 한다는 법 때문이었다. 대다수의 왕릉은 서울과 수도권에 집중되어 있지만, 강원도 영월과 북한 개성 등 예외적인 장소에 조성된 경우도 있다. 조선왕릉 가운데 ‘장릉’으로 불리는 능은 총 3기가 있다. 영월에 있는 제6대 단종의 능, 파주에 있는 제16대 인조와 인열왕후의 능, 그리고 김포에 있는 원종과 인헌 왕후의 능이 그것이다. 김포 장릉의 주인인 원종은 제14대 선조의 아들이자 제16대 인조의 아버지다. 임진왜란 때 선조를 모신 공로로 호성공신이 되었으나 1619년(광해군 11년)에 세상을 떠났다. 인조가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이후 대원군에 봉해졌고, 1632년(인조 10년) 논란 끝에 왕으로 추존되었다. 장릉산 자락에 자리한 김포 장릉은 같은 언덕에 왕과 왕비의 봉분을 나란히 조성한 쌍릉 형식으로 되어 있다. 정자각 앞에서 바라보았을 때 왼쪽이 원종, 오른쪽이 인헌 왕후의 능이다. 추존된 다른 왕릉의 전례를 따라 봉분 아랫부분에 병풍석이나 난간석은 설치하지 않았다. 주변 경관과 잘 어우러지는 것이 조선왕릉의 특징인데, 이곳 역시 아름다운 풍경과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