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고도의 길 익산 미륵사지와 왕궁리 유적, 논산 돈암서원을 방문하려고 길을 나섰다. 조금 늦은 출발이긴 하지만 3시간 정도면 도착할 것으로 예상을 했으나 화성 톨게으트까지 2시간이 결렸다. 당일 방문은 무리라고 판단되어 포기하고, 왕가의 길 화성 융릉과 건릉, 수원 화성, 성남 남한산성을 방문하기 위해 차를 돌렸다.
서울과 수도권에서 만나는 대한민국 역사여행 - ⑨ 왕가의 길
사도세자와 정조의 능 화성 융릉과 건릉
조선 제21대 영조의 둘째 아들인 사도세자는 당쟁에 휘말려 27세의 나이에 뒤주에서 생을 마감한 인물이다. 영조에 이어 왕위에 오른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를 장헌세자로 개칭한 뒤, 배봉산 기슭에 있던 무덤을 1789년(정조 13년) 지금의 경기도 화성으로 이장했다. 당시에는 현륭원으로 불렸지만, 1899년(고종 36년)에 ‘장조의 황제’로 추존되어 융릉으로 승격되었다. 남편과 함께 합장되었던 혜경궁 홍씨도 ‘헌경의 황후’로 추존되었는데, 추존은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죽은 사람에게 임금의 칭호를 주는 것을 말한다. 조선 최고의 명당에 조성된 융릉은 추존왕이라는 사실에 무색할 정도로 장중하고 화려하다. 봉분 아랫부분에는 연꽃 문양이 조각된 섬세한 병풍석을 둘렀고, 능 앞에는 팔각형과 사각형의 석등 양식을 결합한 장명등을 세웠다. 묘역의 불을 밝히는 장명등은 사악한 기운을 물리치는 벽사의 기능을 가지고 있는데, 새로운 양식으로 만들어진 이 장명등은 조선 왕릉에 있는 장명등 가운데 가장 아름답다고 평가받는다. 융릉 서쪽 울창한 숲길 너머에는 정조와 효의왕후 김 씨의 합장릉인 건릉이 자리하고 있다. 원래는 융릉 동쪽에 있었으나, 풍수지리상 그 자리가 좋지 않다고 하여 1821년(순조 21년)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봉분에 난간석만 둘렀다는 점을 제외하면 전체적으로 융릉의 분위기와 매우 흡사하다. 능 입구로 들어가서 걷다 보면 두 개의 갈림길이 나타나는데, 오른쪽은 융릉으로 이어지고 왼쪽은 건릉으로 이어진다. 매년 4월에는 융릉 제향이, 5월에는 건릉 제향이 있다. 소나무와 참나무가 빼곡한 숲길은 도시의 분주함에서 벗어나 고즈넉한 산책을 즐기기에도 좋다.
◈ 정조는 재위기간 동안 여러 차례 능행(陵幸)을 했다. 능행이란 왕이 친히 능에 행차하는 것을 말한다. 정조의 능행길은 단순히 참배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현륭원(융릉)에 갈 때마다 화성행궁에 머물며 여러 행사를 거행했고, 백성들과 적극적으로 소통하며 민원을 처리했다.
건릉은 조선 22대 정조와 효의황후 김씨의 능이다. 정조는 추존 장조의 둘째 아들로 영조가 세상을 떠나자 왕위에 올랐으며, 재위 기간 동안 당파와 신분의 구분없이, 능력과 학문 위주로 인재를 등용하였다. 학문연구기관인 규장각을 설치하였고, 수원 화성을 건축하는 등 많은 업적을 이루었다. 원래 묘호(왕이 세상을 떠난 후 종묘에 신주를 모실 때 붙는 호칭)는 정종이었으나, 1899 년 광무 3년 정조선황제로 추존되었다. 효의황후는 정조가 왕위에 오르자 왕비가 되었고, 생전에 검소하게 지내어 순조가 잘 모셨다고 한다. 1899년 광무 3년 효의선황후로 추존되었다. 건릉은 정조가 세상을 떠나자 현륭원 동쪽에 조성되어 있었으나 풍수상 좋지 않은 땅이라고 하여 효의황후가 세상을 떠난 후, 현재의 자리로 옮겨지면서 합장릉으로 조성되었다.
융릉과 건릉 방문을 마치고 시원한 냉면으로 늦은 점심을 먹고 수원화성을 향해 달렸다. 수원화성 박물관에 들려 스탬프를 찍은 뒤 연무대에 주차를 한 뒤 동장대로 올랐다. 동장대 아래 활쏘기 체험장에는 새만금에서 진행되는 세계 잼버리대회에 참가한 청소년들이 활쏘기 체험과 화성걷기 체험을 하고 있다.
수원 화성
조선 제22대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을 최고의 명당이었던 수원 화산(현재 경기도 화성)으로 옮겼다. 화산 주변에 살고 있던 백성들에게 새로운 터전을 제공하고 당쟁 근절 및 왕도정치 실현을 위해 1796년(정조 20년) 팔달산 아래 신도시를 건설했는데, 그곳이 바로 수원 화성이었다. 정조의 개혁정신을 바탕으로 실학자 정약용의 설계와 문신 채제공의 감독으로 축성된 수원 화성은 거주지 기능과 방어 기능, 상업기능이 합쳐진 성곽도시였다. 동서양의 과학기술과 건축술이 총동원된 이 계획도시는 유례를 찾기 힘들 만큼 독창적이고 독보적이다. 주변 지형을 따라 자연스럽게 지어진 성곽에는 공심돈, 포루, 노대, 봉돈, 암문 등의 시설이 방어와 공격을 효과적으로 할 수 있도록 설치되어 있다. 벽돌로 만든 요새임에도 우아하고 세련된 인상을 풍기는 이유는 전면에 반원 모양의 옹성을 축조한 수원 팔달문보물, 수원천의 범람을 막아주고 방어적 기능까지 갖춘 화홍문, 군사지휘소 겸 휴식공간인 수원 방화수류정보물 등과 같 은 아름다운 건축물 덕분이다. 특히 연못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세워진 방화 수류정 (동북각루)은 수원 화성에서 가장 빼어난 건물로 꼽힌다. 성 안에는 수원 화성행궁사적이 자리하고 있다. 행궁은 왕이 궁궐 밖을 행차할 때 임시로 머무는 궁궐을 말하는데, 화성행궁은 전국의 행궁 중에서도 규모와 격식, 활용도 면에서 으뜸이다. 정조가 사도세자의 무덤에 행차할 때 머물기 위한 처소였지만 평소에는 관청으로 사용했다. 화성행궁의 정전인 봉수당에서는 1795년(정조 19년)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이 거행되기도 했다.
수원 팔달문은 수원 화성의 남쪽 문으로 문의 바깥쪽에는 문을 보호하고 튼튼히 지키기 위해 반원 모양으로 옹성을 쌓았는데 이 옹성은 1975년 복원공사 때 고증하여 본래의 모습으로 복원한 것이다. 문의 좌우로 성벽이 연결되어 있었지만 도로를 만들면서 헐어버려 지금은 성문만 남아 있다.
수원 방화수류정 1794년(정조 18년)에 건립되었으며, 화성의 동북각루인 방화 수류정은 전시용(戰時用) 건물이지만 정자의 기능을 고려해 석재와 목재, 전돌을 적절하게 사용하여 조성된 건물이다. 1848년(헌종 14년)에 중수되었고, 일제강점기 이후 여러 차례 부분적으로 수리되었다.
수원 화성행궁 1789년(정조 13년) 수원읍을 화성시 안녕면 일대에서 팔달산 아래로 옮겨 오면서 관청으로 사용하기 위해 건립하였으며, 왕이 수원에 내려오면 잠시 머무는 행궁으로도 사용되었다. 화성행궁은 1909년부터 수원 주민들을 위한 병원으로 쓰이면서 건물이 철거되어 낙남헌만 남아 있었다.
한양방어를 위한 조선시대 성곽 남한산성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조선 제16대 임금 인조는 명(明)과 가깝게 지내는 정책을 펼쳤다. 당시 명과 대치하고 있던 후금(後金)은 1627년(인조 5년) 조선을 침략 하였는데 이를 ‘정묘호란’이라 한다. 이 전쟁을 계기로 후금과 조선은 '형제' 관계를 맺었으나 두 나라의 관계는 점점 악화되었고, 이후 국호를 청(淸)으로 고친 후금은 대군을 끌고 다시 쳐들어왔다. 1636년(인조 14년)에 일어난 이 전쟁을 ‘병자호란’이라 하는데, 이때 인조가 피신한 곳이 남한산성이었다. 순식간에 한양으로 진격해 온 청의 군대는 한강을 건너와 남한산성을 포위했다. 당시 성 안에 있던 식량은 두 달 분량도 되지 않았다. 고립무원 상태로 버티던 조선은 강화도까지 함락되자 백기를 들 수밖에 없었다. 남한산성을 스스로 걸어 나온 인조는 청의 군대가 머물고 있던 삼전도에서 항복하고 굴욕적인 협정을 맺었다. 청태종은 자신의 공덕을 새긴 기념비를 세울 것을 강요했는데, 그것이 바로 송파구 잠실동에 있는 서울 삼전도비사적다. 패배의 역사가 남아 있긴 하지만 남한산성 자체는 한 번도 함락된 적이 없는 천혜의 요새다. 북한산성과 함께 한양을 지킨 이곳은 673년(문무왕 13년)에 쌓은 주장성의 옛 터를 활용하여 1624년(인조 2년)에 다시 고쳐 쌓은 것이다.이후 여러 차례 개축이 진행됐는데, 특히 한국, 중국, 일본 사이에 이루어진 교류와 서양 무기의 도입은 남한산성 축조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험준한 산세를 이용하여 정교하게 지어진 성에는 많은 건물들이 있었지만, 현재는 동·서·남문루와 방어시설, 군사훈련시설, 관청 등이 남아 있다. 주목할 만한 건물로는 남한산성 행궁사적이 있다. 정무시설 뿐만 아니라 종묘사직의 위패를 봉안한 건물까지 있는 이곳은 남한산성이 유사시에 임시 수도 역할을 할 수 있었음을 보여주는 유적이다.
서울 삼전도비 조선에 조공을 바쳐오던 여진족이 급속히 성장하여 청으로 이름을 바꾸고 조선을 침략하면서 병자호란을 일으켰다. 결국 인조가 한강가의 삼전도 나루터에서 항복을 하면서 강화협정을 맺게 되었고, 청태종이 자신의 공덕을 새긴 기념비를 세우도록 강요하여 세운 비석이 서울 삼전도비이다.
남한산성 행궁은 정무시설은 물론 다른 행궁에 없는 종묘사직 위패 봉안 건물을 갖추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곳은 역사적으로 한 번도 함락되지 않은 대외 항전의 전적지로서 최고의 수준에 달하는 우리나라 성곽 축조기술을 보여주는 남한산성(사적)과 역사를 함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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