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 스탬프 투어

문화유산 방문자 여권 투어 I 왕가의 길 I 종묘, 창덕궁, 경복궁 I 2023년 8월 13일

경원이네 2023. 8. 13. 23:47

'덥다'라는 말보다는 '따뜻하다'라는 말로 위로 받고 싶은 날이다.

집에 있으려니 답답해서 덥지만 문화유산 왕가의 길 한국의 집, 종묘, 창덕궁, 경복궁을 방문했다. 

 

서울과 수도권에서 만나는 대한민국 역사여행 - ⑨ 왕가의 길

 

한국의 집

조선시대 집현전 학자인 박팽년의 사저가 있던 곳으로 국가무형문화재 대목장 신응수님이 경북궁의 자경전을 본떠 1980년에 건축하여 1981년 개장하였다고 한다. 한국의 집은 외국인들에게 한국의 전통생활과 문화를 소개 할 목적으로 건립하여 운영중이란다. 스탬프만 날인하고 종묘로 향했다.

  

 

조선의 선왕들을 모시는 사당 종묘

조선의 왕과 왕비, 죽은 후 왕으로 추존된 왕과 왕비의 신위를 모시는 사당이다. 1394년(태조 3년)에 짓기 시작하여 이듬해에 완성되었다. 유교에 뿌리를 둔 조선왕조는 제사를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유교의 예법을 충실히 따르는 것은 왕실의 권위와 직결되는 일이었기에 태조 이성계는 종묘를 가장 먼저 지었다. 이는 종묘가 국가의 상징이면서 동시에 왕실의 정통성을 보여주는 신성한 곳이었음을 의미한다. 제향 공간의 중심인 종묘 정전국보은 역대 왕들의 신위를 모신 곳으로, 단일 목조 건물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길다. 처음 지었을 땐 규모가 크지 않았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공간이 부족해지자 옆으로 점점 늘려 현재에 이르렀다. 별도의 사당인 종묘 영녕전보물은 태조의 선대 4조와 정전에 봉안되지 않은 왕과 왕비의 신위를 모시고 있다.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간결하고 담백한 건물에서는 절제된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종묘에서 지내는 제사를 종묘제례국가무형문화재,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 라고 한다. ‘대제(大祭)’라고도 부르는 종묘제례는 엄격한 유교 절차에 따라 장엄하게 진행된다. 이때 연주되는 음악을 종묘제례악국가무형문화재,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이라 한다. 연주, 노래, 무용이 어우러져 있는 이 음악은 완전하게 전해지는 왕실의 제사 음악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우리나라 고유의 문화적 특성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독보적인 가치가 있다. 

 

 

가운데 돌로 만들어진 길이 신로이다.

신로는 종묘제례 등 의식을 위해 만든 길로, 가운데가 약간 높고 양옆이 약간 낮은 세 길중, 가운데 길은 신주와 향.축이 들어가는 신로, 동축의 길은 왕이 다니는 어로, 서측의 길은 세자가 다니는 세자로이다. 신로는 외대문 안에서 정전과 영녕전의 남신문까지는 거칠고 박석으로 남신문 안에서 상월대 아래까지는 전석으로 설치되어 있다. 어로와 세자로는 재궁으로 이어진 다음 정전과 영녕전 동문 안 상월대 아래까지 설치되었다.

 

 

'어제를 담아 내일에 전합니다'. 종묘 정전은 보수중이다.

조선 시대 초 태조 이성계의 4대조 신위를 모셨으나, 그 후 당시 재위하던 왕의 4대조(고조, 증조, 조부, 부)와 조선의 역대 왕 가운데 공덕이 있는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시고 제사하는 곳이 되었다. 종묘는 토지와 곡식의 신에게 제사 지내는 사직단과 함께 국가에서 가장 중요시 한 제례 공간이다.

악공청/종묘제례에서 음악을 담당하는 악공과 무원이 대기하는 장소

 

영녕전이다.

영녕전은 정전에 있던 신주를 옮겨 모시기 위해 지은 건물로 '영녕'은 왕가의 조상과 자손이 길이 평안하라는 뜻이다. 공간은 정전과 유사하나 정전보다 규모가 작고 좀 더 친밀하게 지어졌다. 원래 6칸 규모였으나 여러차례 좌우에 칸을 만들어 지금은 16칸의 신실이 있다.

영녕전

 

 

자연과 조화를 이룬 궁궐  창덕궁

종묘방문을 마치고 창덕궁까지 도보로 이동해야 했는데 한 발짝만 움직여도 땀이 줄줄 흐른다. 종묘공원 앞 정류장에서 종로12번 마을버스로 창덕궁으로 향했다. 

 

1405년(태종 5년)에 세워진 조선의 별궁이다.임진왜란 때 경복궁·창경궁과 함께 불에 타 버렸으나 제일 먼저 다시 지어졌다. 경복궁이 중건되기 전까지 조선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경복궁의 건물들이 일직선상에 질서정연하게 지어진 반면, 창덕궁은 자연지형에 맞춰 제각기 다른 형태로 자유롭게 지어졌다. 특히 왕실의 정원인 후원은 인공적인 건축물마저 숲의 일부로 보일 만큼 자연경관을 그대로 살리고 있는데, 이는 자연과의 조화를 추구한 우리나라 특유의 정서와 문화가 반영된 것이다. 창덕궁은 임금과 신하들이 정사를 돌보던 외전과 왕과 왕비의 생활공간인 내전으로 이루어져 있다.창덕궁의 정문이자 외전이 시작되는 창덕궁 돈화문보물은 궁궐 안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임진왜란 때 소실됐다가 1609년(광해군 원년)에 재건되었다. 어진 정치를 펼치라는 의미가 담겨 있는 창덕궁 인정전국보은 즉위식, 결혼식, 세자 책봉식, 외국 사신 접견 등 국가의 중요한 의식을 거행하던 곳이다. 겉에서 볼 땐 2층이지만 실제로는 하나의 층으로 되어 있는 실내에는 아름다운 천장과 일월오악도라는 인상적인 병풍이 있다. 창경궁과 경계를 이루는 담을 따라 올라가면 후원 초입에 위치한 부용지에 다다르게 된다. 창덕궁에 있는 연못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큰 이곳엔 창덕궁 부용정보물이 자리하고 있다. 북쪽은 간결하고 남쪽은 화려하게 만든 이 독특한 건물은 한국 정자 건축의 대표적 작품으로 꼽힌다. 부용지 건너편에 있는 언덕에는 2층짜리 누각인 창덕궁 주합루보물가 있다. 1776년(정조 즉위년)에 지어진 주합루는 학문을 연마하던 곳으로, 1층은 왕실 도서를 보관하는 규장각이었고 2층은 사방의 경관을 조망할 수 있는 열람실이었다. 

 

인정문은 창덕궁의 중심 건물인 인정전의 정문으로, 효종, 현종, 숙종, 영조 등 조선왕조의 여러 임금이 이곳에서 즉위식을 거행하고 왕위에 올랐다. 건물은 앞면 3칸, 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꾸몄다. 건물 안쪽 천장은 천장 재료가 훤히 보이는 연등천장이며, 단청은 가장 소박하게 꾸몄다. 왕위를 이어받는 의식이 거행되던 곳으로, 정전인 인정전과 함께 조선왕조 궁궐의 위엄과 격식을 가장 잘 간직하고 있는 건축물이다.

 

인정전은 국가의 중요한 의식을 치르던 곳으로 왕의 즉위식, 신하들의 하례, 외국 사신의접견 등 중요한 국가적 의식을 치르던 곳이다. 앞쪽으로 의식을 치르는 마당인 조정이 펼쳐져 있고, 뒷쪽으로는 북한산의 응봉으로 이어져 있다. 인정전은 겉보기에는 2층이지만 실제로는 통층 건물로 화려하고 높은 천장을 볼 수 있다. 바닥에는 원래 흙을 구워 만든 전돌이 깔려 있었으나, 지금은 마루로 되어있다. 전등, 커튼, 유리 창문 등과 함께 1908년에 서양식으로 개조한 것이다. 1405년(태종 5)에 창덕궁 창건과 함께 건립되었으나 1418년(태종 18) 박자청에 의해 다시 지어졌고,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10년(광해 2)에 재건하였고, 다시 1803년(순조 3)에 소실된 것을 이듬해에 복원해 현재에 이른다.

 

 

자연과 조화를 이룬 궁권  경복궁

1392년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는 1394년 개경에서 한양으로 천도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1395년 조선왕조 최초의 궁궐이자 제일의 법궁(法宮, 임금이 사는 궁궐)인 경복궁을 완성했다. 도성 북쪽 북악산 기슭에 있는 경복궁은 풍수지리상 명당에 해당되는데, 고대부터 전해오던 도성 건물 배치 형식을 따라 궁의 왼쪽에는 종묘가, 오른쪽에는 사직단이 있다.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은 원래 사정문(四正門)으로 불렸으나 1425년(세종 7년) 광화문으로 바꾸었다. 왕실의 권위가 느껴지는 당당한 궐문 안쪽에는 국가의 큰 행사를 치르거나 왕이 업무를 보는 건물들이 배치되어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는 경복궁 근정전이 있다. 궁궐 안에서 가장 넓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는 근정전은 중대한 의식이 거행되던 곳으로, 왕실의 상징이자 경복궁의 중심이다. 궁궐 뒷부분에는 왕과 왕비의 생활공간과 휴식공간이 자리하고 있고, 서쪽에 있는 연못에는 경복궁 경회루가 있다. 연회장소로 사용된 경회루는 건물 자체도 아름답지만, 주변 풍경과 어우러진 운치 있는 모습으로 인해 궁궐 안에서 가장 인기 있는 장소로 꼽힌다. 1592년 임진왜란으로 불타버렸던 경복궁은 고종 때인 1867년 흥선대원군의 주도로 다시 세워졌다. 중건된 경복궁은 처음 지어졌을 때보다도 규모가 훨씬 컸다.

 

일제 강점기인 1926년 대부분의 건물들을 철거하고 근정전 등 일부 중심 건물만 남겼다. 조선 총독부 청사를 지어 궁궐 자체를 가려버렸다.  그러나 1995년 '역사바로세우기' 일환으로 조선총독부 건물을 철거하고 흥례문 일원을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로 인해 근정문은 보물로 지정되어있지만 흥례문은 보물로 지정되지 못했다. 경복궁에 들어서니 우리나라가 맞나 싶다. 일반관광객도 많지만 잼버리 행사에 참여한 청소년들도 많이 보인다. 저마다 한복을 차려입고 체험하는 모습을 보니 뿌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