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은 법주사에서 2시간을 달려 소수서원에 도착했다. 서원 입구에 들어서니 소나무 숲이 반긴다. 겉과 속이 모두 붉다하여 적송이라 부르는 적송 수백그루가 서원주변을 애워싸고 있다. 겨울을 이겨내는 소나무처럼 인생의 어려움을 이겨내는 참선비가 되라고 이 소나무들을 학자수라고 불렀단다.
한국의 교육 시설 - ⑤ 서원의 길
성리학을 바탕으로 정치와 사회를 주도했던 사림(士林)은 지방에 근거지를 둔 지식인들이었다. 학문과 교육을 중시했던 이들은 지방에 사설 교육기관을 세웠는데, 그것이 바로 서원이었다. 조선중기에 처음 지어진 서원은 학문연구와 인재양성이라는 교육적 기능 뿐만 아니라 뛰어난 선현을 추모하는 종교적 기능도 가지고 있었다. 조선시대의 교육기관에는 제사를 드리는 공간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서원 역시 그러한 공간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성리학적 세계관과 선비정신이 담겨있는 서원은 독자적인 건축양식을 갖춘 우리나라 교유의 문화유산이다. 전국적으로 650여 개에 달했던 서원은 흥성대원군의 철폐령으로 인해 47개만 남게 되었으나, 원래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는 9개의 서원은 '한국의 서원'이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 소수서원
풍기군수였던 주세붕이 고려말 안향의 연고지에 사묘을 세워 위패를 봉안하고 다음해에 학사를 건립하여 백운동서원을 설립한 것이 시초이다. 고려 후기의 문신이자 학자였던 안향은 우리나라에 성리학을 최초로 도입한 인물이다. 서원은 학문 연구와 선현에게 제사 드리기 위해 설립한 사설 교육기관으로, 성리학 전파에 큰 역할을 담당했다. 대표적인 건물로는 학문을 강론하던 영주 소수서원 강학당과 경내에 있는 사당인 영주 소수서원 문성공묘가 있다. 소수박물관에는 안향 초상이 있다. 서원이 건립되기 전에는 숙수사라는 사찰이 있던 곳이어서 영주 숙수사지 당간지주도 남아 있다. 영주 소수서원 강학당은 서원의 양대 기능 중 하나인 학문을 강론하던 장소로 장대석의 높은 기단을 쌓아 그 위에 자연석을 다듬은 초석을 놓았다. 강학당 내부 대청의 북면에는 명종의 친필인 '소수서원'이란 편액이 높이 걸려있다.
영주 숙수사지 당간지주
유교의 성지 소수서원에 불교유적이 있다는 것에 호기심이 생겼다. 원래 이곳은 통일신라시대에 세워진 숙수사라는 절이 있었는데, 출토된 유물이나 유적을 보면 인근 부석사 못지 않게 큰 절이었음을 알 수 있다단다. 당간지주 역시 통일시대 것으로 절터에 서원이 세워졌음을 알려준단다.
경렴정
소수서원의 대표적 유식공간으로 원생들이 시를 짓고 학문을 토론하던 정자이다. 주세붕이 백운동서원을 만들면서 함께 세웠다. 정자 내부에는 이황과 주세둥 등이 자연을 노래한 시를 적은 시판이 걸려 있다. 경렴정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정자 가운데 하나로, 소수서원 원생의 풍류 문화를 엿볼 수 있는 자료이다. 경렴정은 서원과 주변 자연을 이어주는 공간에 있는데, 이곳은 죽계를 끼고 주변을 조망하기에 좋은 장소이어서 원생이나 유림의 모임, 시회개최, 풍류와 심신 수양 등의 활동을 하였던 곳이란다.
강학당
학문을 가르치고 배우던 곳이기 때문에 이름을 강학당이라고 하였다. 강학당은 소수서원의 강학 공간에서 중심이 되는 건물로 가장 규모가 크다. 향교의 명륜당에 해당하는 곳이다. 강학당은 앞면 3칸 옆면 4칸 규모의 기와집으로, 일반적인 한옥 건물의 옆면에 해당하는 부분을 앞면으로 설정한 독특한 구조이다. 지도문을 통해 서원 안으로 들어오면 바로 강당으로 들어갈 수 있게 만들었다. 또한, 건물 앞부분 3칸은 대칭이고 뒤쪽 1칸에는 방을 둔 이른바 전청후실의 특이한 구조이다. 대청은 원생이 모여 공부하던 곳이고 방은 교수가 거처하는 공간이다.
강학당 내부 대청 북쪽에는 명종이 직접 쓴 '소수서원' 편액이 걸려 있다. 그리고 강학당 앞쪽에는 '백운동"이란 편액이 걸려 있는데, 백은동은 소수서원이라는 사인을 받기 이전 이름이다. 강학당은 전체적으로 웅장하고 기품있는 인상을 주는 건물로, 이황의 문하생을 포함해 4천여 명이 넘는 인재를 배출한 유서 깊은 곳이다. 소수서원의 역사와 역할을 이해하는 데에 매우 중요한 자료이며, 건축도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어서 조선 시대 건축사 연구에도 좋은 자료이다.
장서각
서원의 장서각은 나라에서 내려준 책과 서원의 책, 서원에서 출판한 목판들을 보관했던 곳으로, 현대의 도서관과 비슷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소수서원 장서각은 임금이 직접 지어 하사한 책인 어제내사본을 비롯하여 나라에서 내려준 서책과 각종 책 3,000여 권을 보관했던 건물이다. 장서각은 직방재와 문성공묘 사이에 있는데, 앞면 2칸, 옆면 1칸의 기와집으로, 앞면에는 칸마다 문을 달았고 내부는 습기를 방지하려고 마루를 깔았다.
직방재와 일신재
원생과 교수, 임원인 원임들이 생활하던 숙소로 각각 독립된 건물이아니라 하나로 이루어진 독특한 구조이다.일신재와 직방재는 정면 6칸, 측면 1칸반의 팔작지붕양식이다.
학구재와 지락재
원생들이 거쳐하면서 공부하던 곳으로 소수서원의 강학공간에 있는 건물이다.2동의 건물이 조금 떨어져 ㄱ자 모양으로 배치되었다. 지락재는 앞면 3칸, 옆면 1칸 규모의 기와집으로 북쪽의 1칸은 온돌방이고 남쪽의 2칸은 마루인데, 온돌방과 접하는 면을 제외한 마루의 3면은 모두 개방되어있다.
영정각
회헌 안향선생을 비롯한 여섯분의 초상을 봉안한 곳이다.
사료관
소수서원에 대한 관람객들의 이해를 돕고자 관련자료를 정리해둔 곳
경자바위와 취한대
주세붕은 '경'이라는 한자를 바위에 새겨 남겼다. 경자는 선비의 덕목을 나타낸 글자로 공경과 근신의 자세로 학문에 집중한다는 의미이다. 더불어 안향을 공경하고 기리는 마음을 후대에 전한다는 뜻도 있다. 경자위 백운동은 소수서원의 본래 이름이다. 취한대는 자연을 벗하며 시를 짓고 학문을 토론하던 곳이다. 퇴계 이황이 터를 닦고 취한대라 이름을 붙였다. 이는 옛 시 송취한계에서 따온 것으로 푸른 산의 기운과 시원한 물빛에 취하여 시를 짓고 풍류를 즐긴다는 의미이다.
영남 유학의 중심 도산서원
서른 네 살 때 과거에 합격한 이후 4명의 임금을 섬겼던 퇴계 이황은 성리학을 체계화한 조선의 대학자였다. 그는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을 위해 1561년 도산서당을 지었는데, 훗날 그가 세상을 떠나자, 그의 학덕을 추모하는 문인과 유생들이 서당이 있던 자리에 도산서원을 지었다. 1576년에 완공된 서원에는 이황이 직접 설계한 도산서당과 농운정사를 비롯하여 이황의 위패를 모신 안동 도산서원 상덕사 및 삼문, 서원의 강당인 안동 도산서원 전교당 등이 있다. 선조가 서원에 내려준 ‘도산서원’이라는 현판 글씨는 명필 한석봉이 임금님 앞에서 쓴 글씨라고 전한다. 다른 서원과 달리 향사, 도산별시, 선비문화체험 등을 진행하고 있다.
* 향사: 퇴계선생의 유덕을 추모하는 행사(일반인도 참가)
* 도산별시: 1792년 도산서원에서 치루어진 도산별과를 재연하는 전국 한시 백일장




도산서원 양편 산기슭에는 절벽이있다. 퇴계가 자연의 이치를 깨닫고 몸과 마음을 수양하기 위해 산책하던 곳이다. 퇴계는 서쪽 절벽을 '천광운영대', 동쪽 절벽을 '천연대'라고불렀다. 천광운영대는 주자가 지은 '관서유감'이란 시에 나오는 '하늘의 빛과 구름의 그림자가 함께 감도는구나.'라는 구절에서 이름을 지었다. 천연대는 '시경'에 나오는 '솔개는 하늘 높이 날아오르고, 물고기는 연못에서 뛰노네'라는 구절에서 하늘 천과 연못 연을 따서 지었다. 두 이름에는 주변의 절경과, 퇴게가 말년에 이곳에서 자연의 이치를 벗 삼아 학문을 성취하려던 뜻을 담고 있다고 한다.
건너편 정자는 시사단이라는 곳으로 정조임금이 평소에 흠모했던 퇴계선생의 학덕을 기리고 지방선비들의 사기를 높여 주기 위하여 어명으로 특별과거를 보던 장소란다. 총 응시자가 7,228명이었고 임금이 직접 11명을 선방하였단다.
원래는 육지였으나 안동호가 생기며 수몰로 섬이 되었다.



열정
정은 도산서원이 있을 때부터 식수로 사용하던 우물이다. 열정이라는 이름은 '역경'에 나오는 '물이 맑고 차가우니 마실 수 있다.' 라는 구절에서 따왔다. 그리고 퇴게는 '서당의 남쪽에 맑고 차며 단맛의 옹달샘이 있다.'라며 시를 짓기도 했다. 우물은 마을이 떠나가도 옮겨가지 못하고, 아무리 물을 퍼내도 줄지 않으며, 오가는 사람 모두가 마실 수있다. 이와 같이 세상에 널린 지식을 부단한 노력으로 쌓아 우물과 같이 사회에 꼭 필요한 인재가 되라는 뜻을 담고있다.

도전교당
도산서원의 강당으로 1574년에 세웠다. 강당은 유생들이 경학을 공부하는 서원의 중신 건물로 대청과 서쪽에 한존재라는 온돌방이 있다. 원장이 머물렀던 한존재의 문을 들어 올리면 대청까지 트인 넓은 공간이 확보된다. 전교당 서쪽 계단 옆에는 높게 만든 돌기둥 위에 반원 모양의 돌을 받쳐놓았는데 이것은 밤에 행사를 할 때 불을 밝히던 '정료대'이다.

동재와 서재
도산서원 유생들이 거쳐하면서 공부하던 기숙사이다. 상급생들이 사용했던 동재의 이름은 박약재, 서재의 이름은 홍의재이다.
광명실
책을 보관하고 열람하던곳이다. 이름에 포함된 의미는 '수 많은 책들이 밝고 환하게 비추어 준다.'이다. 습기로 책이 망가지는 것을 막기 위해 2층 누각으로 높게 지었다. 현판의 글씨는 퇴게가 직접 썼다.
정우당
도산서당에 있는 작은 연못 속에 연꽃을 심어 '정우당'이라 하였다. 글자 뜻대로 한다면 '깨끗한 벗이 있는 연못'이라는 뜻이다. 연꽃은 진흙 속에서 피지만 더렵혀지지 않고 맑고 깨끗한 꽃을 피우므로, 퇴계는 절의를 지키는 정결한 군자의 모습으로 상정하였다.
도산서당
퇴계가 만년에 머물면서 제자들을 가르쳤던 곳이다. 1560년에 완성되었으며 도산서원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원래 부엌, 온돌방, 마루로 되어 있었는데, 제자들이 늘어나면서 부엌과 마루를 확장하였으며 확장한 마루 위에는 덧지붕을 달았다. 퇴계가 머물던 방의 이름은 완락재인데 완상하며 즐긴다.'의 의미이다. 제자를 가르쳤던 마루는 암서헌으로 '바위에 깃들어 작은 효험을 바란다.'는 뜻을 포함한다. 두 이름 모두 주자의 글에서 따온 것으로, 학문의 즐거움과 겸손한 마음을 담았다.
•덧지붕 지붕의 물매(수평을 기준으로 한 경사도)를 잡기 위하여 서까래를 덧대어 꾸민 지봉.
농운정사
퇴계의 제자들이 머물면서 공부하던 기숙사이다. 건물은 '공' 모양으로 하였는데 학생들의 공부가 성취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퇴계가 설계하였다. 농운정사는 세 부분으로 구성되었다. 동쪽 마루는 시습재로 공부를 하는 곳이고, 서쪽 마루는 관란헌 휴식을 취하는 공간이었다. 마루 뒤쪽에는 지숙료가 있는데 서당에 공부하러 온 학생들이 머물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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