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 스탬프 투어

문화유산 방문자 여권 투어 산사의 길(보은 법주사, 영주 부석사) 2023년 10월 12일

경원이네 2023. 10. 15. 17:07

제주도를 포함해서 집에서 가까운 지역 60여%의 문화유산 방문을 마쳤다. 이제 충북 1곳과 경상도와 전라남도만 남았다. 4일 간의 휴식시간을 이용해서 충북 1곳과 경상도 일부지역을 방문을 했다.  8시 30분 충북 보은 법주사 방문을 시작으로  2시간을 달려 영주 소수서원과 부석사 관람을 마치고 나니 오후 2시 30분이다. 이번 여정은 문화재 관람시간보다 이동시간이 많이 걸린다.   

 

 

한국의 산지승원 - ④ 산사의 길

산사는 한반도 남쪽 지방에 위치한 통도사, 부석사, 봉정사, 법주사, 마곡사, 선암사, 대흥사 등 7개 산지승원을 일컫는다.

7세기에서 9세기에 창건된 이들 7개 사찰은 신앙과 수행, 일상생활을 중심으로 한 한국 불교의 역사적인 발전 모습을 보여준다.  또한 한국 선불교의 특징인 자급자족이 가능한 사찰관리, 승려교육, 수행과 교리학습 뿐만 아니라 한국 불교의 무형적, 역사적 측면도 확인 할 수 있다. 경내에는 한국의 다양한 불교신앙이 수용되어 있으며, 역사적으로 중요한 다수의 구조물과 전각, 유물, 문서등은 한국 불교의 포용적 특성을 잘 반영하고 있다.   

 

 

속리산의 보물창고 보은 법주사

서기 553년 의신조사께서 창건한 역사 깊은 고찰로, 수많은 문화유산과 불교전통을 간직한 호서지방 제일의 가람으로 알려져 있다. 기록에 의하면, 사찰이 번성할 때는 60여 동의 전각과 70여 개의 암자를 거느린 대찰이었다고 전해지나 전란으로 대부분 소실되어 현재는 30여 동의 건물만이 보존되어 있다. 또한 법주사는 목조탑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팔상전을 비롯하여 국보와 보물을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는 문화유적지이다. 법주사는 불교의 유토피아 사상이라 할 수 있는 미륵신앙의 중심사찰이기도 하다. 중생들의 욕심이 하늘에 닿을 만큼 가득차서 세상이 혼란스러워지면 그 때 미륵불이 출현하여 새로운 삶의 방향을 제시한다는 가르침이다. 

속리산 국립공원 깃대종 하늘이 앞에서

 

속리산 자연관찰로는 법주사 매표소에서 일주문까지 이어지는 숲길로 속리산국립공원에 자생하는 동. 식물관찰과 자연에 대한 이야기를 알 수 있는 길이고, 세조길은 조선 7대 임금인 세조가 요양차 속리산을 방문했을 때 복천암까지 오고간 순행길이란다.

 

일주문 우측에 세워진 작은 문장대 

문장대는 원래 큰 암봉이 하늘 높이 치솟아 구름 속에 감추어져 있다하여 운장대라 하였으나, 세조가 속리산에서 요양을 하고 있을 때 꿈속에서 어느 귀공자가 나타나" 인긍의 영봉에 올라서 기도를 하면 신상에 밝음이 있을 것"이라는 말을 듣고 찾았는데 정상에 오륜삼강을 명시한 책 한권이 있어 세조가 그자리에서 하루 종일 글을 읽었다 하여 문장대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마애여래의상(보물 제216호)

사리각 옆 추래암(墜來岩) 암벽에 조각되어 있는 불상으로서 둥근 얼굴과 감은 듯이 뜬 눈, 그리고 두툼한 입술, 반듯한 어깨, 유난히 잘록한 허리 등 비사실적 추상성을 띠고 있다. 의자가 된 연봉은 연꽃잎이 불상 주위를 둘러싸고 있으며, 발아래 지면에는 절반만 조각된 연화문상석이 놓여 있다. *전체 높이 6.18m, 연화대좌석 높이 2.84m, 평면 연화석 폭 2.27m

 

석연지(국보 제64호)

신라 성덕왕 19년 경에 조성된 것으로서, 8각의 지대석 위에 3단의 괴임을 만들고 다시 복련을 두른 굄돌을 올렸으며, 그 위에 구름을 나타낸 동자석을 끼워 연지를 받치고 있다. 원래 이 석연지는 법주사의 본당이었던 용화보전이 있었을 때 그 장엄품을 설치했던 것으로 극락정토의 연지를 상징하며 화강석으로 조각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구품 연화장으로 환희원만 영원무궁 상품상생 광도중생 무량수의 감로천이다. *높이 1.95m, 둘레 6.65m

 

법주사 사천왕문

정면 5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집이다. 신라 진흥왕때 처음 세웠으며, 혜공완 때 중창하고, 조선인조와 고종 때 각각 중수하였다.

 

팔상전 (국보 제55호)

우리나라의 현존하는 유일한 목탑인 팔상전은 사찰 창건 당시에 의신대사가 초창했다고 전해진다. 신라 혜공왕 12년에 진표율사가 중창했었으나, 정유재란 때 불타 없어졌던 것을 1602년부터 사명대사(송운 유정)과 벽암대사에 의해 조선 인조 2년에 다시 복원된 것이라고 전해오고 있다. 1968년, 팔상전 해체 중수공사시 중앙의 거대한 심주(心柱) 밑에 사리장치가 발견되어 팔상전 건립 경위를 밝히는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전각 내부에는 사방 네 벽에 두 폭씩의 팔상도(석가여래의 일생을 8단계로 나누어 표현한 그림)가 모셔져 있으며, 그 앞에 불단을 만들어 불상을 봉안하고 불상 앞에는 납석원불과 나한상이 모셔져 있다.

 

금동미륵대불

금동미륵대블은 용화정토에 이르러 깨달음의 법을 설하시는 미래의 미륵부처님의 현존을 의미한다. 화강석으로 만든 높이 약 8m에 이르는 기단 위에 높이 약 25m의 거대한 이 청동대불은 국내에서 최대의 규모이며, 소요된 청동은 약 160톤에 이른다고 한다. 조성 당시, 불신을 13등분하고 다시 각 등분한 것을 4조각으로 나누어 총 52조각을 용접하고 이어 붙여 올라가는 어려운 공법으로 조성된 미륵불이다. 불기 2534년 4월 11일, 6년간의 발원으로 조성공사 후 점안의식 과정에서 세 차례에 걸쳐 하늘이 환하게 열리며 5색 서광이 하늘을 수놓고, 흰 광선이 미륵불로부터 치솟았다고 이 자리에 참석했던 불제자들은 전하고 있다. 금동미륵대불 기단부 안에는 미륵보살께서 머물고 계신 도솔천의 모습을 형상화시킨 용화전이 있으며, 용화전 벽면에는 13개의 미륵십선도가 부조되어 있다. 그 후 이 청동미륵대불에 대한 개금불사가 불기 2546년 6월에 회향되었다.

 

쌍사자 석등(국보 제5호)

신라 성덕왕 19년에 만들어 진 것으로 추정. 높이 3.3m에 이르는 8각 석등으로 두 마리의 사자가 마주서서 뒷발로 복련석을 디딤하여 앞발로 양련석을 받들고 있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사자가 디딤한 복련석은 8각 지대석 위에 놓여 있으며, 양련석 주위에는 이중으로 연꽃잎이 조각되어 있다. 신라시대 석등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서 신라시대 석조예술품 중 뛰어난 걸작 중의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원통보전 (보물 제916호)

법주사 창건 당시 의신조사에 의해 지어진 건물로서 776년에 진표율사가 중창하고, 임진왜란 떼 소실된 것을 1624년 벽암대사가 다시금 복원하였다. 전각 내부에는 앉은키 2.8m, 허리둘레 1.9m의 거대한 목조의 관음보살좌상(보물 제1361호)이 자비가 넘치는 상호로 봉안되어 있다. 원통보전은 정방형의 특이한 건축양식으로서 조선 중기의 미묘하고도 화려한 건축미를 보여주고 있고, 주심포계의 단층 건물로 사모지붕에 절병통으로 조성된 특유의 형식을 지니고 있다.

 

희견보살상(보물 제1417호)

신라 33대 성덕왕 19년경에 조성된 입상으로 향로를 머리에 이고 있으며, 향로 용기의 면에는 연화문이 조각되어 있다. 보살상은 앞가슴 부분의 법의가 벌어져 있고, 힘이 들어간 듯한 근육이 조각 자체를 강하게 느껴지게 한다. 높이 약 2m, 붉은 화강석 재료의 조각상이다. 

 
대웅보전(보물 제915호)
얕은 기단 위에 서 있는 중층인 이 건물은 신라 진흥왕 14년 의신조사가 창건하고, 인조 2년에 벽암대사가 중창한 것으로 총 120간, 건평 170평, 높이 약 20m에 이르는 대규모의 건축물이다. 내부에는 앉은키가 5.5m, 허리둘레 3.9m에 이르는 국내 소조불 좌상으로 가장 크다고 알려진 3신불이 안치되어 있다. 

 

사천왕석등(보물 제15호)

상대석에 사천왕이 새겨져 있어 사천왕 석등이라 부른다.

 

철확(보물 제1413호)

신라 성덕왕 때 주조되었다고 전해오며 높이 1.2m, 직경 2.87m, 두께 10.8cm의 거대한 이 쇠솥은 신도 3만 명이 먹을 장국을 끓이던 솥이라고 하기도 하며, 임진왜란 당시 승병들이 이 솥을 이용하여 배식하였다고도 전해오고 있다.

 

보은 속리 정이품송

높이 16.5m,가슴 높이의 줄기 둘레는 5.3m이며, 수령은 약 600년으로 추정, 우리나라에서 보기 드물게 모양이 아름답고 큰 소나무다. 이 소나무에 얽힌 이야기가 있는데, 세조가 속리산 법주사로 행차할 때 임금이 타고 있던 가마가 이 소나무 아랫부분 가지에 걸리게 되어 임금이 "나뭇가지에 연이 걸린다." 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자 이 소나무는 스스로 가지를 위로 들어 올려 임금의 가마가 무사히 지나가도록 했다고 한다. 이를 기특하게 여긴 세조가 그 자리에서 지금의 장관급에 해당하는 정 2품의 벼슬을 이 소나무에 내려 이때부터 정이품송으로 불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전통과 아름다움이 깃든 산사  영주 부석사

한국화엄종의 근본도량으로 신라 문무왕 16년 의상대사가 왕명을 받들어 창건하고 화엄의 큰 가르침을 펴던 사찰이다. 일주문을 지나서 펼쳐지는 은행나무길은 탄성을 자아낸다. 천왕문을 지나고 안양루를 거쳐 무량수전에 닿는다. 기둥하나, 문창살 하나에도 천년의 세월을 느낀다. 부석사는 의상대사가 세운 이른바 ‘화엄 10찰’ 가운데 한 곳으로 예로부터 우리나라 화엄종의 본사로 여겨졌으며, 창건 이래 의상대사의 법을 전하는 제자들에 의해 지켜져 온 중요한 사찰이다. 이곳엔 안동 봉정사 극락전 다음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물인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이 있다.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은 부석사의 중심 건물로 극락정토를 상징하는 아미타여래불상을 모시고 있다. 무량수전 뒤에는 ‘부석(浮石)’ 이라고 새겨져 있는 바위가 있는데, 『 송고승전』에 있는 설화가 남아 있다.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목조 건물 중 안동 봉정사 극락전(국보)과 더불어 오래된 건물로서 고대 사찰 건축의 구조를 연구하는 데 매우 중요한 건물이 되고 있다.

 

부석사 당간지주

신라시대의 석조 유물이다. 1300여년 전의 이 당간지주에는 화엄종찰을 알리는 깃대와 깃발이 꽃혀 있었겠지만 지금은 한쌍의 돌기둥만이 남아있다. 당간지주는 일주문을 지나 천왕문에 다다르기 전 왼편 중턱에 서있다. 높이는 4.8m이다.

 

부석사 삼층석탑

통일신라 하대에 조성 한 것으로 동탑의 높이는3.6m, 서탐의 높이는 3.77m이다. 양탑 모두 원위치가 아니고 부석사 동쪽에 있던 이름 모를 사지에서 1966년 현 위치로 옮겨 세웠다고 한다.

 

범종각

일주문, 천왕문, 회전문 다음으로 맞이하게 되는 문으로, 누각식 문이다. 아래층은 통로이고, 2층은 운판, 목어, 법고가 놓여있다.

 

안양루

조선후기의 목조건축물로서 범종루를 지나 누각 밑을 통과하여 무량수전으로 들어서게 하는 건물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인다포계 겹처마 팔작지붕의 2층 누각 건물로서, 석축위에 세워졌다.

 

무량수전과 석등

무량수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 단층 팔작지붕 주심포계 건물이며 부석사의 본전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목조건물 중 하나로 손꼽힌다. 배흘림기둥, 안쏠림, 귀속음, 안허리곡 등의 기법이 사용되었다. 석등은 높이 2.97m, 신라시대의 전형적인 팔각석등으로 상하 비례의 교묘함이나 조각의 정교함에서 신라시대 석등 중에서도 손꼽히는 걸작이다. 화창 주위에 작은 구엄을 돌려 뚫고 나머지 네 면에는 보살 입상 1구씩 조각되어 있는데 조각수법이 매우 정교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