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 스탬프 투어

문화유산 방문자 여권 투어 천년 정신의 길(안동 하회마을, 경주 대릉원, 경주 첨성대, ) 2023년 10월 13일

경원이네 2023. 10. 15. 17:15

대한민국 정신을 걷다 - ⑩ 천년 정신의 길

우리는 거대한 유적에 압도되고, 오래된 건물에 감동하며, 정교한 유물에 감탄한다. 흥겨운 가락에 들썩이는가 하면, 신나는 놀이에 흥분하기도 한다. 길어야 백 년 정도 살 수 있는 인간은 자신보다 오래 살아남는 것들을 만들어 냈고, 일부는 지금도 우리와 함께 호흡하고 있다. 이득한 세월을 이겨냈다는 점만으로도 오래된 것들은 특별하다. 그러나 문화유산 앞에서 감정의  스펙트럼이 확장되는 건 그 속에 담겨 있는 '정신'과 무관하지 않다. 모든 문화는 인강의 정신 활동과 관련되어 있다. 보이지 않는 정신은 유형의 유산뿐만 아니라 무형의 유산에도 반영된다. 그렇기에 유무형의 유산들이 산재해 있는 장소를 둘러보는 것은 과거로부터 이어져 온 정신을 더듬어 본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 신비로운 여정의 시작과 끝 사이에는 각기 다른 매력을 가진 두 도시가 있다. 천년고도 경주와 한국 정신문회의 수도 안동이다.

 

 

독특한 문화를 간직한 씨족마을 안동 하회마을

안동 하회마을은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유교문화가 살아 숨쉬고 있는 상징공간으로 가장 한국적이며 독창적인 문화를 간직한 씨족마을이다. 또 자연에 순응하며 서로 교감하고자 한 우리 민족의 자연관을 바탕으로 상호이해와 소통을 통해 흐트러짐 없이 건강한 공동체적 삶을 오늘날까지 이어오고 있는 곳이다. 마을의 이름인 하회는 '강이 휘돌아 흐른다는 뜻으로, 이는 낙동강이 마을의 삼면을 크게 휘감으며 흘러가는 데서 유래한다. 하회마을의 지형은 위에서 내려다 보았을 때 산과 강이 감싸도는 모습이 각각 'S자 모양을 이루고 있다고 해서 '산태극. 수태극'이라고도 불리며, 마치 연꽃이 물위에 뜬 듯한 모양이라 해서 '연화부수형", 배가 물건을 가득 심고 나아가는 모양 같다고 해서 행주형이라고도 표현된다.

2010년 7월, 브라질 브라질리아에서 개최된 제34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는 마을주민들에 의해 전승되고 있는 다양한 생활 문화가 이제는 한국을 넘어 세계인들이 지키고 이어가야 할 가치를 지닌 것으로 평가하며 하회마을을 세계유산에 등재했다. 유네스코는 하회마을의 세계유산 등재를 확정 짓는 결의문에서 "한국인의 전통적인 삶이 그대로 전승되고 있는 생활공간이며, 주민들이 세대를 이어 삶을 영위하고 있는 '살아있는 유산(iving Hieritage)'으로서,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온 한국인의 삶이 인류의 문화유산으로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등재 이유를 밝히고 있다.

부용대에서 바라본 하회마을

부용대

 '연꽃을 내려다보는 언덕'이라는 뜻이다. 이곳에서 내려다보면 하회마을이 물 위에 떠 있는 한 송이 연꽃처럼 보이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었다. 부용대에서는 하회마을과 마을 앞의 만송정 숲, 그리고 마을 전체를 휘감아 도는 낙동강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경치를 즐길 수 있다. 류운룡, 류성룡 형제는 부용대 왼쪽과 오른쪽에 겸암정사와 옥연정사를 짓고 학문에 힘쓰며 제자들을 가르쳤다. 부용대 절벽의 허리 부분에는 겸암정사와 옥연정사를 잇는 좁은 벼랑길이 있는데, 형제는 이 길을 서로 왕래하며 우애를 다졌다고 한다. 하회마을의 옛 선비들은 부용대에서 매년 음력 7월 선유줄불놀이를 즐기고, 배를 띄워 시를 짓기도 했다.

 

충효당

조선 중기 때 재상이자 학자였던 류성룡 가문의 종택으로, 손자 류원지가 류성룡의 학덕을 추모하기 위해 유림과 제자들의 뜻을 모아 지었다고 한다. 류성룡은 벼슬을 마치고 귀향한 후에 풍산현에 있던 작은 초가집에서 죽음을 맞이한 것으로 전해진다. 서쪽을 앞면으로 하여 긴 행랑채를 두고, 안쪽으로 ㅁ자 모양의 안채와 -자형의 사랑채가 연이어 있다. 12칸의 긴 행랑채는 류성룡의 8세손인 류상조가 병조판서에 임명된 뒤 부하 군사들을 수용하기 위해 지었다고 한다. 충효당이란 이름은 류성룡이 평소에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 효도하라.'고 강조한 데서 유래하였다. 

 

양진당

풍산 류씨의 큰 종갓집으로,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학자인 류운룡 가문이 사는 집이다. 양진당은 류운룡의 선조 류종혜가 14세기 말 하회마을에 처음 들어왔을 때 터를 잡은 곳이며, 집의 건물은 류운룡의 아버지 류중영 이 지었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불에 타서 다시 고쳐 지었고, 그 후 여러 대에 걸쳐 다시 지은 흔적이 있다. 사랑대청 북쪽 벽에 걸려 있는 양진당이란 현판의 이름은 최초로 풍산 류씨 족보를 완성한 류영의 호에서 따온 것이다. 사랑채 앞에는 류중영의 호 입암을 따서 지은 입암고택 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안동 하회마을 삼신당
삼신당은 하회마을에서 가장 중앙에 위치해 있다. 류종혜가 입향할 때 심은 것으로 전해지며 수령이 600년이 넘는 나무이며 마을 사람들이 성스럽게 여기고 있었다. 하당으로도 불리며, 화산 중턱의 상당서낭당,중당국신당과 함께 마을 주민들의 소망을 비는 삼당을 이룬다. 정월 대보름 밤에 마을의 안녕을 비는 동제를 상당과 중딩에서 지내고, 그 다음 아침에 여기서 제를 올린다. 이곳에서 하회별신굿탈놀이가 시작된다.

 

안동 하회마을 방문을 마치고 경주에 도착을 했다.

먼저 방문 할 곳은 첨성대와 대릉원, 알려진 만큼 많은 사람들이 몰려있다.

첨성대 주변을 두바퀴 돌고나서야 간신히 주차를 했다.

첨성대는 물론이고 대릉원도 포토존엔 줄을 서있다.

 

신라의 거대한 고분군 경주 대릉원 일원

경주시내 황남동 일대에 분포되어 있는 신라초기의 무덤들로 일부는 대릉원 구역안에 있다. 일제강점기에 붙여진 일련번호 90~114, 151∼155호인 원형으로 흙을 쌓아올린 30기의 무덤이다. 큰 무덤은 돌무지 덧널무덤이고 주변에는 봉분이 없어진 작은 무덤이 있다. 대릉원 안에는 전 미추왕릉을 비롯하여 천마총과 황남대총 등이 있다.


1973년에 발굴조사된 천마총은 지름 47m, 높이 12.7m로 금관을 비롯하여 많은 유물이 나왔다. 당시 천마도가 그려진 말안장 드리개가 출토되었기 때문에 '천마총'이라 이름하여 내부를 공개하고 있다. 또한 1973년부터 1975년까지 발굴조사된 황남대총은 남북길이120m, 동서길이 80m, 높이23m의 거대한 쌍무덤으로 남쪽 무덤에서는 금동관과 남자의 뼈 일부 및 많은 유물이 나왔다. 북쪽 무덤에서도 금관과 '부인대' 라는 글씨가 있는 과대 등 많은 유물이 나왔다. 남쪽 무덤의 주인은 남자, 북쪽 무덤의 주인은 여자로 부부의 무덤을 붙여 만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황남대총은 황남동에 있는 신라 최대의 고분이라는 뜻으로 붙여진 명칭으로, 고분공원 조성 계획에 따라 경주고적발굴 조사단이 1973년부터 1975년까지 발굴 조사하였다.


황남대총

남북으로 두 개의 무덤이 서로 맞붙어 있으며, 남쪽 무덤을 먼저 만들고 뒤이어 북쪽 무덤을 잇대어 만들었다. 무덤 구조는 모두 돌무지덧널무덤 으로 남분에는 남자가 묻혔고 북분에는 여자가 묻혔으며, 이들은 부부로 추정된다. 신라의 쌍무덤 가운데 가장 크고 주인공들은 화려한 황금 장신구로 치장하고 있어 마립간기의 왕릉으로 보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 현재 학계에서는 무덤의 주인공을 제17대 내물왕과 제18대 실성왕 조 제19대 눌지왕 중 한명으로 추정하고 있다.

 

천마총

신라의 대표적인 돌무지덧널무덤이다. 1973년 황남대총을 발굴하기에 앞서 돌무지덧널무덤의 발굴 경험과 지식을 쌓기 위해 이 무덤을 먼저 발굴 하였다. 그 결과 도굴되지 않은 채 온전히 남은 무덤이 확인되었다. 무덤에서 자작나무 껍질에 천마가 그려진 말다래가 발견되어 무덤의 이름을 천마총이라 하였다. 이 무덤에서 광복 후 처음으로 신라 금관이 출토되었으며, 많은 금 공예품과 유리그릇 등 귀중한 유물 11,500여 점이 출토되었다. 무덤은 지상에 덧널을 설치하고 돌무지로 감싼 후 흙을 덮어 마무리한 형태이다. 무덤이 만들어진 시기는 대략 서기 500년 전후로 추정된다. 무덤의 주인을 갈문왕 등 왕족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지금은 무덤 내부를 볼 수 있도록 복원하고 주요 출토 유물을 복제하여 전시하고 있다.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천마총 출토 유물을 다시 정리하면서 천마가 그려진 대나무 재질의 금동 장식 말다래와 칠기 말다래 등이 추가로 확인되었다.

 

 

동양의 오래된 천문관측대 경주 첨성대

첨성대는 동양에서 만들어진 가장 오래된 천문 관측대이다. 「삼국유사」의 '지기삼사를 참고하면 신라 선덕여왕 재위 때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고대 사회에서 하늘의 움직임을 살피는 천문 관측은 국가의 길흉을 점치는 것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국가적으로 큰 관심사였다. 첨성대는 다듬은 돌을 받침대 위에 27단으로 원통형으로 쌓아 올렸는데, 아래쪽이 부르다가 위로 갈수록 점차 수직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그 위에 긴 돌을 맞물려 우물 정井자 모양을 얹었다. 안쪽은 12단까지 자갈과 흙으로 채우고 그 위로는 비어 있으며, 13단과 15단 사이에 정남향으로 창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사람이 가운데로 오르내리면서 천문을 관측했다.'는 기록이 있어 첨성대의 기능을 알 수 있다. 첨성대를 멀리서 보면 정자형의 우물이 하늘을 향해 솟은 모습이어서 의례 상징물 혹은 기념비적 건축물로 보는 견해도 있다.